내줄 건 과감히 내주고…대한항공, M&A 승부수 통했다

2024. 2. 24.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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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9부 능선
인천국제공항 주기장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EU 경쟁당국은 두 회사의 합병을 조건부 승인했다. [뉴스1]
‘내줄 것은 과감히 내주는 대신 실익은 확실히 챙긴다.’ 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M&A) 절차를 밟고 있는 대한항공이 그동안 보여준 행보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M&A를 위해 필수 승인 받아야 하는 14개국 중 미국만을 남겨둔 상태다. 지난달 일본이, 이달 유럽연합(EU)이 각각 승인한 만큼 미국의 승인도 상반기 중 유력하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미국은 한국과 항공자유화 협정을 맺고 있어 운수권 없이도 취항할 수 있다. 경쟁 제한 우려가 적어 대한항공의 독과점 우려도 덜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두 항공사가 결합하면 매출 약 22조원, 자산 42조원 규모의 세계 7위의 ‘초대형 항공사’(메가 캐리어)로 거듭나게 된다.

항공업은 조선업처럼 주요국의 ‘역외 적용 조항’ 대상 산업이라 국내 기업 간 결합이더라도 해외 경쟁당국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M&A도 2021년 EU 경쟁당국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까지 중국과 영국 등 11개국에서 승인 받아 M&A에 탄력을 받는 듯 했다. 하지만 결합 후 독과점 가능성을 우려한 EU가 지난해 심사 기한을 연장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이 과정에서 대한항공은 안팎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내줄 것은 확실히 내주면서 실익을 챙기는 뚝심과 결단력을 보였다. 이를 진두지휘한 게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다. 조 회장은 지난해 영국 승인 당시엔 런던 히드로공항의 슬롯(특정 시간대 항공기의 이·착륙 권리) 7개와 인천~런던 노선 운수권을 영국 항공사 버진애틀랜틱에 넘기기로 하면서 독과점 우려를 해소했다.

이번 EU 승인에서도 대한항공 4개 노선의 운수권 일부를 반납하고, 슬롯 이전을 진행하기로 한 점이 주효했다. 아시아나항공의 화물 사업 부문 매각은 한층 어려운 결정이었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매출의 20%대가 화물 사업에서 발생했고, 유럽 시장점유율도 2022년 기준 19%로 높은 편이다(대한항공 40.6%, 외항사 40.3%, 기타 0.1%). 알짜배기 사업권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 몰리자 안팎의 비판도 거셌다.

조원태
하지만 조 회장은 포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 아시아나항공 측에 화물 사업을 분리해서 매각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 11월 이사회에서 이를 가결했는데, 이는 EU 승인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조 회장이 공식석상에서 “합병 절차에 ‘플랜B’(차선책)는 없다”, “합병 후 경영 성과를 못 내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는 등 그간 M&A에 강한 의지를 보여 온 것도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평가다.

국내 대기업 오너로서는 이례적으로 해외 언론 인터뷰에 나서면서 대내·외의 우려 최소화를 시도하는 한편, 좋은 이미지를 심은 게 해외 경쟁당국 심사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실제 조 회장은 지난해 6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미국 블룸버그TV와 인터뷰해 “우리는 여기(M&A)에 100%를 걸었다”며 “무엇을 포기하든 반드시 성사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직접 외교전에 가세한 것도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 회장은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경제사절단에 합류한 데 이어 5월엔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 원유석 아시아나항공 대표와 함께 미국 경쟁당국인 미 법무부 차관을 만나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그룹 총수가 M&A 의지와 관련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기업 결합과 관련된 이해관계자와 투자자 등을 안심·이해시킬 수 있다”고 전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EU 승인 덕에 9부 능선을 넘은 대한항공은 늦어도 10월 전까지 M&A를 위한 입찰과 매수자 선정 등 준비를 마친다는 계획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EU 경쟁당국의 승인을 기점으로 미국 경쟁당국과의 협의에 박차를 가해 조속한 시일 내에 기업결합 심사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전했다. 다만, 미국 경쟁당국의 승인이 있더라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실질적 통합까지는 2년가량이 더 걸릴 전망이다. 이때까지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독립 운영되며, 이후 ‘통합 대한항공’이 출범할 예정이다.

두 회사가 통합되면 경쟁사로서 불필요하게 소모했던 에너지를 국내 항공산업 투자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대한항공이 항공 MRO(정비·수리·분해조립)와 항공우주, 도심항공모빌리티 등에 투자를 늘리면 국내 항공업계가 전반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찮다. 우선 경영 성과를 통해 국부유출 우려를 씻어내야 할 숙제가 남았다. 특유의 결단과 뚝심으로 슬롯이나 알짜 사업권을 매각하면서 경쟁당국의 승인을 받았지만 동시에 국부유출, 실익이 없는 M&A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유진철 아시아나항공 노조 사무국장은 “미국·유럽 등 핵심 취항지 주요 슬롯을 외국 항공사에 넘기는 것은 사실상의 국부유출”이라고 비판했다.

일각에선 이번 M&A가 조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비판론도 나온다. 2019년 취임한 조 회장은 이후 누나 조현아(조승연으로 개명) 전 대한항공 부사장 등과 경영권 분쟁에 처했지만 산업은행이 M&A 지원을 위해 8000억원을 투자, 조 회장의 핵심 우호 주주가 되면서 승기를 잡은 바 있다.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부유출이나 경영권 방어 목적의 M&A 비판을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실적밖에는 없다”며 “조 회장의 리더십은 이제부터가 본격 시험대”라고 말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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